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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하늘을 걷다


 

하늘을 걷다

-윈난성 리장


해가 갈수록 리장(麗江)에 대한 그리움은 커졌다. 우연히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었는데 보통 때면 그냥 지나갔을 영상에 내 눈이 꽂혀버렸다. 내가 그토록 사모하는 리장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오라고 손짓하는 듯 했다. 그래, 리장으로 가자. 4년을 다닌 지하철공사에서 해고당한 동생과 제자 둘 우리는 그렇게 윈난성 리장으로 떠났다.

시산에서 고지 적응 훈련을 마친 우리(5월호 밥진)는 서부커윈짠(西部客运站)으로 향했다. 따리, 리장, 샹그릴라행 장거리 버스를 타는 곳이다. 리장까지 가는 버스는 침대버스로 열 시간을 누워서 가야한다. 중국의 일반적인 장거리 교통수단은 기차고 기차는 편리한 만큼 이용객도 많아 적어도 일주일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암표를 사던지 버스표를 구해야한다. 빠르고 편리한 비행기도 있고 얼마 전 리장행 기차도 생겼지만 시간이 촉박한 우리가 이용할 수는 없었다. 4장의 표를 가위바위보로 순번을 정했다. 물론 탑승하기 전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자리에 앉을지 모른다. 좌석이 정해지고 희비가 엇갈렸다. 남우는 화장실 문을 마주하는 자리, 출이는 머리 위에 텔레비전이 있는 자리, 현수는 평범한 창문 자리, 난 화장실 앞자리다. 타기 전 경고 아닌 경고를 했기에 순순히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며 중국 대중교통수단 즐기기에 빠졌다. 쉴 새 없이 떠들어대기, 해바라기씨, 수박씨, 호박씨 까대기, mp3최대 볼륨으로 켜두고 음악듣기, 여기 저기 가래 기침 뱉는 소리에 심지어는 스몰스몰 밀려들어오는 담배연기까지 대륙의 버스 안은 참으로 각양각색 버라이어티하다. 무엇보다도 힘이 드는 건 팔 다리를 쭉 펼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20여명의 사람들이 봅슬레이를 타면서 10시간을 달리는 묘한 버스. 잠이 올 듯 말 듯 피곤에 지쳐 뒤척이다가 낮의 산행이 힘들었는지 잠이 들었다.

세찬 빗줄기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긴 어딘가?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보니 리장에 도착했나보다. 지금 시각이 다섯 시. 하지만 아무도 요동하지 않았다. 버스 기사를 깨워 짐을 내려 달라고 하자 뭐가 그리 급하냐고 더 자라고 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고 아무 승객도 내리지 않았다. 그냥 기다리려는 너무 추웠다. 우산을 꺼내 쓰고 화장실을 갔다 오니 비가 잦아들자 승객들이 하나 둘 내린다. 우리도 짐칸에서 짐을 내리고 택시를 잡아탔다.

“수허고성(束河古镇)으로 가주세요!”

리장에는 몇 개의 고성(高城)이 있다. 흔히 말하는 리장고성은 나시족(纳西族)의 중심지로 대연전(大硏塡)을 말하는 곳으로 약 800여년전에 건설되었고 1996년 리히터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하여 주변 신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리장고성은 전혀 붕괴되지 않아 세계의 이슈가 되었고 삼 년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제는 그 유명세 때문에 서울의 명동보다도 더 복잡하고 화려한 곳이 되었지만 처음 리장을 왔을 때 느낌은 내가 신혼여행을 간다면 이곳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연전보다도 더 오래된 도시가 수허고성이고, 수허고성이 리장고성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거기서 옥룡설산 쪽으로 수킬로를 더 가면 바이샤(白沙)가 나오는데 광야를 떠돌던 나시족들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라고들 한다.

수허의 아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맑고 고요하고 투명했다. 가슴으로 들어오는 청량한 구름알갱이들이 온 몸으로 퍼져 내가 구름이 된 게 아닌가 착각했다. 뭐가 그리도 바빴을까.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거기서 제공되는 우리네 쌀죽보다는 묽은 시판(稀飯)과 설탕 없이 튀긴 꽈배기 같은 요티아오(油條)로 아침을 대충 넘기고 또 길을 나섰다. 맑고 깨끗하고 시린 청록색 연못이 우리의 시선을 잡았다. 구딩롱탄(九鼎龍潭). 아, 저 물고기가 무엇이던가? 맑고 찬물에서만 산다는 팔뚝만한 산천어, 열목어 떼들. 그런데 연못가에는 바나나나무가 섰고 녹색바나나가 주렁주렁 달린 게 아닌가. 지금이 아무리 팔월이지만 여긴 해발 2400미터 고산이라 점퍼를 입어도 추운 곳인데 바나나를 보니 어색했다.

수허의 거리는 고요했지만 모두들 열심히 각자의 일에 열중이었다. 손님맞이를 준비하는 가게들. 채마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말을 손질하는 할아버지. 한 아주머니가 세숫대야에 하얀 액체를 휘젓고 있다. 아주머니 이게 뭡니까? 야크요구르트란다. 가격도 저렴해 요구르트를 하나씩 사서 마셨다. 우유로 만든 요구르트보다 더 시고 고소했다. 아마도 설탕을 비롯한 여러 첨가물을 넣지 않아서 그럴 것 같다.

걷다보니 수허의 명물 대작교를 만났고 거기서 차마고도박물관을 물어물어 갔다. 중국의 대부분 박물관이 터무니없는 입장료를 받고 있지만 여긴 다행히도 공짜다. 뭐 특별히 볼 건 없어도 마방의 종착역이 바로 이곳 리장이었으니 그 시절의 화려한 영화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박물관 여기저기를 공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여기도 곧 입장료를 받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박물관을 나오니 한 할아버지가 수로에서 송이버섯을 씻고 있었다. 1kg은 족히 넘으리라. 이거 파나요? 얼마입니까? 깎아서 30위안 주고 샀다. 한화로 약 6,000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어떻게 먹을까. 처음엔 생송이를 먹지 못해 커피포트에 살짝 데쳐 먹었지만 나중에는 껍질의 흙을 털어내고 생으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우리는 이날 산 송이를 시작으로 집으로 가는 날까지 매일 송이향에 취해서 지냈다. 8월의 윈난은 송이만 구할 수 있다면 비행기 티켓은 뽑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라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자전거로 바이샤 마을을 다녀왔다. 이곳은 수허에서 설산쪽으로 3km 정도를 더 올라가면 나오는데 나시족 마을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거리에는 살아있는 세계문화유산인 할아버지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시절의 악기들이 중국 본토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나 이곳 오지 리장에서는 아직도 대대로 전해지고 있단다. 말 그대로 고악(古樂)이다. 다만 이곳의 젊은이들도 나시고악보다는 팝이나 유행가를 더 좋아해 머지않은 미래에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들 안타까워한단다.

바이샤에는 나시고악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곳이다. 흔히들 바이사 벽화라고 하는 불교 그림이다. 중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이지만 한족(漢族)의 역사가 아니라 보존에 신경을 쓰지 않아 많이 훼손되었지만 늦게나마 그 가치를 안 서양 여행객들의 소개로 서구의 돈으로 보존하고 있단다. 이 벽화 한 자락을 보기 위해 입장료 30위안에 고성발전기금 80위안을 내려고 하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어 동생과 아이들은 두고 혼자만 갔다 왔다. 특별히 볼만하다거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없었으나 다만 사라져가는 옛 유산에 조그만 보탬이 되었다는데 의미를 두겠다.
짧은 시간 둘러본 바이샤를 떠나 우리는 리장고성으로 향했다. 리장고성이야 전에도 세 번이나 왔기에 생략할 수 있었지만 동생의 성화에 발길을 돌렸다. 도시의 곳곳을 감싸 흐르는 맑은 물 운하, 빨간색 등, 고풍스런 건물, 그리고 길게 늘어진 수양버들.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서울 신도림역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인파. 이제 고요한 오지 리장은 어울리자 않는 이름이 되었다. 먼저 무푸(木部)를 들어갔다. 이곳의 통치자인 목씨성의 장군은 자신의 성씨 때문에 도시 주변에 나성(羅城)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한자대로 곤란한 곤(困)이 되면 정말 곤란해지니 물로 그 경계를 삶고 젖줄로 관리했다고 한다. 한 때 그 세력이 커져 티베트의 소금마을 옌징(鹽井)까지 떨쳤고 지금껏 여러 왕조가 변했으나 리장고성과 무푸가 그대로인 것을 보면 그의 선택이 현명했는지도 모른다. 무푸의 규모는 덕수궁 정도였으나 덕수궁이 여백의 미가 있다면 무푸는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푸의 뒷산은 사자산으로 그 꼭대기 즈음에 완고루라는 정자가 있고 고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사자산을 오르는데도 완고루를 오르는데도 입장료를 받고 있으니 길바닥에 돈을 뿌리는 격이라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차라리 현지인이 운영하는 전망 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고성을 구경하는 것이 나을 듯.

사자산에서 내려오는 길 현수와 남우는 나무두꺼비에 빠졌다. 지난 1월에 석환이가 빠졌던 그 두꺼비. 조그만 막대기로 두꺼비 등을 문지르면 마치 두꺼비 소리를 내는 악기 또는 장식품 정도라 보면 좋겠다. 결국 흥정 끝에 두꺼비 두 마리를 사고 저녁을 먹기 위해 사쿠라로 갔다. 사쿠라는 한국인 여자와 중국인 남자가 결혼을 해 그들의 로맨스가 온 중국 연인들의 로망이 되어 경주의 황남빵처럼 리장의 명소가 된지 오래다. 한국음식과 신라면, 조선족 지배인 등 사막 한 가운데를 다니던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발견하듯 배고픈 한국인에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신라면아 너 얼마만에 보는 거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사랑해주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모두 비울 때 쯤 하늘이 잠시 열렸다. 옥룡설산이 보일 수도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반짝거리는 설산의 자태는 뭐라 설명할 수 아름다움이었다. 너무 급히 뛰쳐나갔나. 신종플루를 예방하기 위해 들고 갔던 손 소독제를 사쿠라에 두고 왔나 보다.(신종플루가 막 유행을 시작하던 시절)

설산을 본 후 스팡지에(四方街)로 걸었다. 스팡지에는 중세 유럽의 광장처럼 도시의 상징이자 중심이다. 여기선 나시족 할머니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강강술래 비슷한 춤을 추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나도 그들을 촬영하다 결국 그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이 춤도 아마도 세계문화유산이라지.

스팡지에에서 얼마를 더 걸어 시장이 나왔다. 얼마나 다양한 물건들이 나오는지 이마트의 신선코너는 초라해져버리는 수준이다. 게다가 저렴한 가격까지. 우리는 시장 한 바퀴를 한 후 송이를 사서 발길을 돌려 마오쩌뚱 동상을 마주한 리수진사(麗水金沙)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지난 겨울 본 인상리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공연이었다. 사람과 조명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훌륭한 극이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따리의 호접지몽과 비교할 수 있을 듯. 너무나 중국스럽고 중국만이 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나오니 너무 추웠다. 회족이 파는 양꼬치를 입에 물고 택시를 탔다. 숙소에 도착하니 아침에는 없던 한국인 여행객이 송이를 탐낸다. 수허의 야경을 보며 밤을 지새우고 싶었지만 내일부터 2박3일간 후타오샤(虎跳峽) 트래킹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찍 잠자리에 누었다. 밀린 숙제를 한 기분이다. 몸은 뻐근했지만 편히 잘 수 있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