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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구름의 남쪽에서


 

구름의 남쪽에서

-쿤밍 시산산림공원


2009년 8월 22일.

벌써 일곱 시. 잠자리에 누운 지 네 시간 밖에 안 지났지만 금쪽같은 휴가를 낸 우리는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여행을 떠나면 언제나 새벽같이 일어나 종일 걷다가 제일 늦게까지 잠들고도 피곤해 하지 않는다. 어쩌면 여행 체질이라 할 수도 있을 만큼 매 순간이 흥분되고 새롭다.

“오늘은 고산지 적응을 위해 시산(西山)을 등반하겠다.”

시차 적응도 고도 적응도 못한 일행. 하지만 대장의 한마디 일정 발표에 눈곱을 채 떼지도 못한 채 숙소를 나와 아침꺼리를 찾았다. 벌써 출근하는 자전거 떼들이 지나갔는지 음식물을 쌌던 비닐봉지들이 인도를 꽉 매웠고 아침 장사들이 거의 철수한 상태였으나 때마침 ‘얼콰이’ 장사가 남은 떡을 굽고 있어 2원(元)씩을 주고 아침을 때웠다. 자장면 따위를 제외한 중국음식을 처음 접한 일행들의 얼굴을 보니 참 재미있었다. 현수와 출이는 뭣 하러 이런 걸 사먹느냐는 표정이다.

얼콰이(饵块)를 들고 버스정류소에서 운남민속촌행 버스를 탔다. 이런 저런 불평으로 자연스레 말문이 터였다. 아마도 처음 따라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한국에 알려진 중국은 대륙시리즈로 대변된다. 다들 중국이라 하면 더럽고 괴기하고 뭔가 저급한 곳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럴 때면 이상하게도 난 중국 편이 되어 열을 올린다. 하지만 문화차이는 문화차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논쟁 끝에 종점에 도착했다. 대문을 마주보고 민속박물관과 민속촌이 이웃해있다. 저녁이면 이곳 쿤밍을 떠날 예정이기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이들은 반발했지만 미리 짜진 계획대로 박물관을 택했다. 벌써 세 번째 와보는 박물관이지만 역시 새롭다. 지금껏 세뇌됐던 중화사상(中華思想) 때문일까. 변방(邊方)이라 알고 있던 윈난(雲南) 역사가 주는 위대함과 놀라움. 무엇보다도 10원이라는 아주 저렴한 입장료가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돌고 나니 배가 몹시 고팠다. 역시 대륙은 박물관마저 광활했다. 근처 식당을 발견하고 이층 테라스가 보이는 곳에서 음식을 시켰다. 알고 있는 음식은 ‘량미센(凉米线)’이라는 비빔국수 밖에 없다. 메밀묵 비슷하게 보이는 음식이 있어 그것도 시켰더니만 이게 문제였다. 양념한 묵의 고명이 어성초 뿌리와 잉어껍질이었다. 나는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 웬만한 향신료도 맛있게 먹는데 어성초 뿌리는 아직도 도전과제다. 거기다 익힌 잉어가 아니라 생 껍질이이라니.

미식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시산케이블카 입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수양버들과 유칼립투스 가지와 이파리들이 손을 흔든다. 재팬트리의 노란 꽃과 부겐베리아 연보라 꽃들도 싱그럽다. 어찌나 상쾌한 바람이 불던지 도레미송을 부르며 달려가는 마리아와 아이들이 된 기분이었다.

왕복표를 끊었다. 덜컹. 눈으로 볼 땐 천천히 가는 것 같았지만 대륙의 케이블카는 Ktx처럼 달리는 것 같았다. 바다같은 호수를 건너는 케이블카. ‘쿤밍호(昆明’湖)라 불리는 ‘톈츠(滇池湖)’. 그런데 톈츠의 색깔이 이상하다. 케이블카터미널에서 시산공원으로 통하는 도로를 기점으로 뎬츠의 물빛은 극명하게 나뉜다. 왼쪽은 푸른빛이지만 오른쪽은 짙은 녹색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심각한 녹조 현상으로 물 색깔이 변한 것이다. 사실 뎬츠는 10여년 전부터 부영양화가 진행되어 녹조가 생겨났단다. 급속한 경제 개발 속에 인근에 공장지대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면서 화학물질이 축적됐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생활하수와 농경지의 폐수는 뎬츠를 더욱 죽음의 호수로 만들었다. 뎬츠는 쿤밍 일대의 광대한 평야를 살찌우는 젖줄일 뿐더러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고원강남(高原江南)으로 불렸다. 뎬츠의 높은 명성 때문에 베이징의 이화원(頤和園)에 있는 호수를 쿤밍호라고 지을 정도였는데 이제 마시는 것은 고사하고 수영조차 하기 힘들다. 뎬츠는 물고기조차 살기 힘들 정도로 오염이 심각하다. 손이라도 닿는다면 피부병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쩐지 점심 때 잉어껍질을 먹기 싫더니만 이제 뱃속에서도 살기 싫다고 꿈틀거린다.

케이블카는 깎아지는 산 중턱에 내려준다. 시산은 밖에서 볼 때는 바위산 밖에 몰랐는데 아주 훌륭한 숲이었다. 녹조가 낀 호수로 숨 쉬는 것조차 갑갑해 갑자기 숲을 누비고 싶었다. 위로 올라갈까 아니면 내려서 다시 올라갈까 고민하다 2km를 내려서 도교사원인 ‘싼친거(三淸閣)’에서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끝없는 편백 숲. 그리고 그 비좁은 사이로 비집고 온 한줄기 빛들. 태양은 이곳의 만물에게 뭔가 맑고 촉촉하면서도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몇 십 년인지 아니면 몇 백 년인지 그 나이는 알 수 없으나 편백 숲 그늘은 코끝을 싸하게 하고 가슴까지 뻥 뚫어주었다. 이제 겨우 10분을 걸었을 뿐인데 1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다시 케이블카 하차장까지 올라갔다. 한 떼의  중국인 단체관광객들.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내며, 엄청난 속도로 해바라기씨를 까대며 셔틀에 올라탔다.

“니치날(你去哪儿)?”

롱먼(龍門)에 간단다. 걸어가면 될 것을. 그럼 우리는 걷자. 잠시만. 역시 대륙의 포스는 남다르다. 시산산림공원 케이블카 따로, 입장료 따로, 롱먼 입장료 따로.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로마의 법을 따를 수밖에. 입장권에는 AAAA급 공원이란다. 우리가 느끼는 가치와는 뭔가 다르다. 다만 깎아지는 절벽의 1,333개의 돌계단을 걸어야만 롱먼을 만난다는 것이다. 역시 뭔가 허술한 것이 스릴 만점이다. 거의 마지막에 도착할 즈음 앞이 막혔다. 저질체력 아저씨들이 가마를 타고 내려간다고 비켜서야 했다. 절벽 쪽에 바짝 붙었지만 한국인의 시각으론 가마타고 내려가는 저 분들이 비싼 돈 주고 왜 여기를 왔는지 궁금했다.

와, 롱먼이다. 양씨부자가 73년만에 망치와 정으로 절벽에 길을 뚫어가며 만들었다는 롱먼. 대단하다. 장자(莊子) 노자(老子)를 비롯한 온갖 산신령들이 살만한 곳이 분명하다. 중국에는 두 개의 롱먼이 있다. 물론 둘 다 바위절벽 속의 석굴암이다. 차이가 있다면 시산의 롱먼은 도교 사원이다.

감상도 잠시 셔틀 손님이 몰려와 조용하던 암자가 시장 바닥이 되었다. 어여 나서자. 저긴 어디지 바위들이 멋지구나. 롱먼 앞에서 빠오처 영업을 하는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석림(石林)이란다. 어의가 없어 웃음이 난다. 어리숙한 외국인들을 석림으로 꼬득여 무슨 떼돈을 벌려고 저러는 걸까.

1885m에서 시작한 등산 2350m까지 올라갔다. 쿤밍이 발아래다. 아니 천하가 발아래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어라. 쿤밍의 끝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희뿌연 것이 민속촌과 박물관까지 밖에 못 알아보겠다.


"세상의 마지막 나무가 베어져 쓰러지고,

세상의 마지막 강이 오염되고,

세상의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후에야

그때서야 그대는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걸 깨닫겠는가!"


북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을 한다고 십리 밖도 못 보게 만들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과 바람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지난겨울 100년만의 추위가 닥쳐왔다고 했을 때도, 지구온난화로 봄이 없어지고 있다고들 할 때도 숲은 숲이고 바람은 바람인데 쉽게 없어졌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내가 미안하다.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세상의 모든 숲을 누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