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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설국 한라산 백록담


2011년 겨울과 함께 찾아온 라니냐로 한반도가 온통 꽁꽁 얼어붙었다. 부산에선 거의 백 년 만에 낮은 기온을 기록했다는 뉴스를 전했고, 여기저기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추위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웬만해선 눈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서도 눈을 굴리며 돌아다니면 발자국마다 뽀드득 소리가 따라다녔다. 아직 아이의 모습을 벗지 못해서일까. 눈 소식에 괜스레 들떠서 지내다 한라산에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를 보고 갑작스런 배낭을 싸게 되었다.

제주도라. 제주도가 주는 불친절함과 비싼 물가로 동남아 등지로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켠에는 제주도라는 집을 마련해놓고 방 한 칸에는 한라산 등반이 또 다른 방에는 비자림숲이라는 이름을 달아놓고 거기를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이나 그 숲에서는 녹나무도 자라고 있으니 토토로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이러한 나의 바람은 몇 번의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도 이룰 수 없었고 기대 이상의 실망만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토록 제주행에 목을 매는 이유는 3년 전 2월 부산발 제주행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놀라운 광경 때문이다. 폭풍주의보로 온 세상이 구름이 가득했지만 그 구름 위로 우뚝 솟아 찬란하게 빛나는 눈덮힌 한라산이여. 카메라를 꺼내 찍으려 했지만 승무원들의 제지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그 산. 이제 간다.

제자 현수와 진성이와 함께 남포동에서 밥을 먹고 배에 올라탔다.(옛날 디모데이고 현재 중 2. 현수는 함께 티벳 땅 호도협을 트래킹했던 아이) 이제 이배는 열시간 뒷면 제주항에 도착할 것이다. 잠을 잘 자야 내일 산행이 즐거운데 잔 건지 안 잔 건지 뒤척이다 새벽을 맞았다. 다섯시반에 아침밥을 먹고 배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고 성판악으로 향했다. 해발 팔백미터까지는 이제 차가 올라가니 당일 산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성판악 산장에 내렸을 즈음 아직 해뜰 시간은 멀었고 익숙하지 않은 장비를 착용하느라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은 사진에서나 본 눈을 즐기느라 강아지처럼 촐랑거리며 여기저기를 좇아다닌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착용했을 즈음 헤드랜턴을 두고 온 것을 알았다. 아뿔사. 다행히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어 앞 사람의 발뒤축만 따라가면 곧 해가 뜰 것이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 소리만큼이나 상쾌한 눈길이다. 아직은 소리뿐이다. 사람들이 다니는 곳은 약간의 장비만으로도 다닐 수 있지만 그 옆을 스틱으로 찔러보니 눈이 쌓이고 쌓여 백이십센티 이상씩 들어간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큰 일 날 수도 있겠다.

각 삼백미터마다 고유번호가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이 또한 정말 감사할 일이다. 티벳에서 타르초가 주는 안정감과 비교할 수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해가 뜨는가보다. 만물이 살아서 내 눈으로 들어왔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편백나무숲을 지날 때에는 마치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풍경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뻔 했다. 이때 누군가 터키젤리를 주면 덥석 물고 마녀에게로 넘어갈지도 모를 정도의 환상이었다.

첫 번째 난코스 사라오름. 하지만 사라오름을 올라가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출발한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인데 진성이가 퍼진 것이다. 이건 진성이의 체력 때문이 아니라 입고 온 옷 때문이다. 겨울철 산행에서는 절대 면소재 옷을 입으면 안된다. 면 소재 옷 특히 내의 위에 청바지는 온 몸에 얼음주머니를 감싸고 다니는 격이다. 옷을 제대로 입으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건만 춥다며 어머니가 면내복에 몇 티셔츠에 그 위에다 후드티까지 그리고 다운파카에 고어텍스가 아닌 비닐 바람막이. 이 건 뭐 당장에라도 산행을 그만두고 헬기를 타고 내려가야 할 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워서 옷 몇 개는 가방으로 넣고 절대 쉬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걷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꿈꾸던 한라산보다 훨씬 더 환상적인 산행이 되겠구나. 하나님.

초컬릿으로 겨우 기운을 차리고 물을 마시려고 하니 아내가 싸준 물이 모두 꽁꽁 얼어있었다. 우리가 많이 올라왔나보다. 귀도 멍멍해지고 잠시 쉬는 동안에도 불어오는 찬바람을 피하고 싶었다.

지옥 같은 사라오름을 지나 진달래대피소에 다달았을 즈음 진성이의 모습은 흡사 패잔병이었다. 하지만 광야에서 지친 히브리인들이 엘림에서 위로를 받은 것처럼 대피소에서 파는 컵라면에 새 힘을 얻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컵라면이 눈을 밝게 했을까. 그제서야 우리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 말씀만으로 어찌 이걸 다 만드셨답니까. 겨울 산행의 백미라는 덕유산 눈꽃 산행과도 비교할 수 없고, 지난 여름 경험한 야딩의 아름다움과도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라산. 새롭고 경이롭다. 말로는 표현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렸다.

이제 백록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정상 정복을 위해 체력을 모두 쏟아선 안 된다. 최소한 삼사십퍼센트는 남겨두어야 하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성이는 지금으로선 초인적인 어떤 은혜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아, 주님. 진성이배낭을 받아 산을 올랐다. 이렇게 가비야븐 것을 힘들어하다니.

드디어 정상등극. 예상대로 백록담은 얼어있었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가만히 서있기도 힘들었다. 백록담이 주는 감탄사는 잠시 진성이는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콧물까지도 얼어있었다. 체감온도 영하삼십도는 되었으리라. 안되겠다. 발열도시락에 찬물을 부었다. 잠시후 팔팔 끓는 도시락을 들고 숟가락도 꺼내지 않고 씹으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다. 발열 도시락이 대박을 터트릴 줄이야. 사람들이 우리가 뜨거운 밥을 먹고 있는 것이 신기한지 구경하다가 사진까지 찍는다.(모르시는 분은 전투식량닷컴을 쳐보세요.)

짧은 시간 우리는 다시 체력을 회복하고 하산한다. 올라올 때와는 달리 관음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조금 험하긴 해도 눈밭은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기에 올라올 때보다 더 짧은 길을 택했다. 눈이 많긴 정말 많다. 아이젠을 착용하고도 미끄러지는 분들은 배낭에서 비료푸대를 꺼내 그걸 타고 내려가신다. 우와 재미있겠다. 누가 버리는 거 없나.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도 버리지 않고 우리 앞을 자가용처럼 쌩 지나가버린다.

눈밭을 누비는 까마귀떼며, 하늘을 돌고 있는 매와 독수리, 그러다 눈 마주친 고라니. 어디 하나 안 어울리는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한라산이다. 5-7표지석이 나오자 새벽 택시기사님께 전화를 했다. 드디어 다 오긴 왔나보다. 초보산행꾼 진성이도 미소를 짓는다. 이십킬로미터 눈길을 어떻게 걸었을까. 갑자기 진성이가 너무 예뻤다. 나에게 엄청난 책임감과 오래참음을 가르쳐준 고마운 선생님이다.

제주항에 도착하자 몸이 천근만근이다. 지체의 일부는 버리고 싶을 정도였지만 매콤한 갈치조림으로 피로를 풀고 배에 올랐다. 한일전 축구를 본다고 하고선 다들 일찍 골아떨어졌다. 눈에 실핏줄 세워가며 응원했는데 졸전 끝에 승부차기로 지는구나. 내일 아침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가겠지만 마음 한켠의 한라산방에는 불이 켜졌다. 그리고 조그마한 소리로 읊조린다. 나 한라산 정복했어.

 

Tip 1. 겨울철 산행 필수 준비물 : 아이젠, 스패츠, 스틱, 폴리에스테르 내의, 고어텍스바람막이, 고어텍스등산화(브랜드 불문. 생존을 위한 필수품)

Tip 2. 한라산 등반은 비행기보다는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크루즈가 적당함. 비행기로는 삼일, 배로 가면 36시간이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 배를 타고 토요일 산행하고 주일 새벽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음. 물론 숙박비도 전혀 들지 않음.

이렇게 했을 때 비용 : 왕복배삯+왕복택시비+조식+발열도시락=8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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