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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동티벳 여행기 6 리장, 어디까지 가봤니?


아름다운 새소리와 한줄기 빛 때문에 눈을 떴다.
아침이구나.
오랜만에 느끼는 너무나 개운한 아침이다.
어제 난 코라 도중 너무 힘들어
왜 나에겐 새힘을 주시지 않습니까 푸념을 했다.
아, 이런 거구나.
제게도 주시는구나.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민박집 열다섯난 아들은 돌쟁이 동생을 등에 업어 얼르고 있고,
이웃집 아가씨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다가
날 보더니만 우리집에 더운 물 계속 나오니 자기네로 옮기라고 소리친다.
민박 주인은 수유차를 권하며
수유차의 위력을 설명한다.
물론 앞의 몇 마디 말고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아침을 먹고 어제는 목표를 두고 갔다면
오늘은 기어이 즐기고 오겠노라고 다시 산으로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으로 또 갔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야딩은 여전히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야딩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어제와 달리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낙융목장까지 올라가다 그냥 빽도했다.
헐, 이러다 대한민국의 산들까지도 얕잡아 보겄네. 큰일이다.
쉬어야겠다.
몸도 마음도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리장으로.
물론 리장까지도 만만치 않지.
꼬박 달려도 2박3일이 아닌가.
먼저 따오청으로 내려가 하루를 묵고 생각해야지.
다행히 유스호스텔을 잡아 쉬고 있는데
한국인 4명을 만났다.
서울에서 따리에서 위해에서 심천에서 야딩을 보겠다며 들어오다가 만났단다.
간만에 한국사람들이랑 있으니 즐거웠다.
서울에서 온 미술선생님은 첫 해외여행이란다.
첫 여행을 너무 쎈 곳으로 왔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그럭 저럭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근처 빈관에서 결혼식이 있어 구경을 했다.
낯선 이방인이 사진을 찍고 있으니 돈을 내란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환영해준다.
신부와 신랑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다.
그 옛날 천하의 당나라를 굴복시키고 장안을 정복한 토번의 송첸캄포 옷이 저랬을까.
이 산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럭셔리한 신랑신부를 보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따오청에서 샹청으로 샹청에서 샹그릴라로
샹그릴라에서 리장으로 달렸다.
끝없는 협곡과 백설기같은 집들과 야크.
샹그릴라를 끝으로 티벳탄들의 땅은 끝이다.
물론 리장에도 티벳탄들이 있지만 거기서 그들은 소수민족일 뿐.
이제 다시 올 때까지 짜이찌엔.
 
대설산 고개를 넘어 가며 언제 다시올꼬 눈에 마음에 담아두자 몇번이고 되새긴다.
 
허전함을 송이로 달래고 한잠을 잤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바라기.
익숙한 저 길.
 
난 마치 고향이라도 온냥 편안했다.
유채밭 뒤로 보이는 옥룡설산.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06년 여름 디모데 세놈이랑 이곳을 다녀간 이후 뿅간 후
그 후로도 몇번이고 댕겨갔던 곳.
 
그리고 야딩을 가기 전 마지막 중국 여행도 바로 이곳 리장.
 
그리고 아내랑 아이들이랑 마지막으로 살고 싶은곳도 바로 리장이다.
 
사람들이 내게 어디를 다녀왔냐고 물어본다.
리장.
내게 물어본 열에 아홉은 리장을 모른다.
리장을 안다고 한 사람도 중국 계림의 리장을 말하는 사람이 절반이다.
흔히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라고 말하는 투로
왜 하필 거기 가냐고.
하지만 내게 리장은 특별했다.
티벳의 끄트머리 리장이 왜 그리 사랑스러웠을까.
 
작년 목사님과 지티 선생님들과 함께 본 공연
인샹리장에서
"해가 떠도, 해가 져도, 눈이 내려도 난 항상 여기 있습니다.
이곳 리장은 언제나 당신이 다시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축복의 땅 리장은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리장으로 다시 오세요."
"후일라이 리장!"
배우들의 대사에 나도 모르게 다시 오겠다고 대답해버렸다.
어찌되었던 그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내 마음에 울리고 있고.
리장에서 선생님을 찾는다고만 하면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리장은 나시족과 이족과 장족과 누족과 리수족이 어울려 사는 곳이다.
물론 평지에는 나시족이 차지하고 있고 모든 관광지는 그들의 것이다.
움직이는 곳 마다 세계문화유산이고
고성에 쏟아지는 사람은 신도림역의 출퇴근시간을 방불케할만큼 많았다.
이처럼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기 전 관광을 할 수 있는 곳은 저렴하게 다 다녀온지라
딱히 리장에서 할 일이 없어보였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이곳에서의 삶을 그려보며
시장이며 집이며 길이며 들판이며 호수를 싸돌아댕겼다.
옛날에는 옥룡설산자연보호구 안에만 돈을 내었지만
지금은 발길 닿는 곳마다 야매로 돈을 내라는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이에 굴할소냐.
구글어스를 켜고 시골로 시골로 들어갔다.
 
마침 리장에 사는 이족들의 훠바지에 기간으로 반라의 불꽃축제가 시작되었다.
충격적이지만 이곳은 아프리카도 아마존도 아닌 세계 최대 공산국가 중국 한가운데다.
 
원래 훠바지에는 이족들의 축제인데
인근 다른 민족들도 불장난을 따라해 고성 내에서도 여기 저기 불을 붙여놓았다.
밤내 화약소리도 끊이지 않고
옛날의 고요한 리장은 어디갔을까.
 
리장을 떠나기 전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약 100년 전 영국의 제임스 O. 프레이저 선교사가 평생을 걸어 섬긴 리수족을 만나는 것이다.
현재 리수족은 노강가 란창강, 진사강 주변 산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중 소수민족이지만
선교사 한 사람의 죽음으로 현재 리수족의 90퍼센트 이상이 복음화된 놀라운 열매다.
작년 선교 훈련을 받으며 레포트를 위해 읽은 '山비'라는 책의 배경이 되는 곳을 가기 위해 준비했다.
리장에서 스구로 가는 길 역시 험란했다.
스구는 티벳에서 발원한 진사강(양쯔강)이 동남아로 흐르다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향해 몰꼬들 돌린 곳으로
삼국지의 제갈량도 여기서 나룻배를 타고 건넜으며
쿠빌라이칸도 이곳을 건너 남조국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너무나도 조그마한 동네다.
마침 장이 열려 좁은 길을 피할 곳도 없었다.
스구의 장에서 묵 한사발 사먹고 샹핑즈로 올라갔다.
스구같은 곳을 놔두고 왜 꼭대기에 올라가서 살고 있을까.
물론 나시족이 포기한 산꼭대기가 아니었다면 저들이 발붙일 곳도 없었으니 하나마나한 질문이다.
새벽에 출발해 거의 10시경에 샹핑즈교회에 도착했다.
교회라해도 작은 오두막 정도였지만
주일학교 학생만 70여명이나 된다고 하니 과히 대단하다.
아니 잠깐.
중국은 7일장이니 모두들 장터가는 길은 아예 포기하고 예배당에 와서 종일 예배하는구나.
그것도 1박 2일을 걸어와 예배당에서 하루를 기숙하며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했고 나에게는 이런 간절함이 왜 없는가 하며 부끄럽고 부러웠다.
예배는 엄숙하면서도 자유롭고, 즐거우면서도 유쾌했다.
리숫말로 진행하는 예배는 무슨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간간히 중국어로 무슨 성경 몇장 몇절 하는데 그것만 찾아보았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다."
목사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셨고 회중은 크게 아멘했다.
동네별 찬송을 하는데
하스데반목사님의
"기뻐하며 찬양하리 민족과 열방 가운데..."
하는 찬양을 불르는 자매들이 있었다.
익숙한 찬양을 땅끝에서 그들의 노래로 들었다는 것에 감동했다.
예배는 말씀과 찬송 광고와 또 말씀 간증 찬송... 끝이 없었다.
10시쯤 도착했는데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오후 세시가 넘도록 누구하나 요동하지 않고 말씀에 집중하였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아...
새로운 피냄새를 맡았을까 벼룩 때문에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어 일어났다.
잠시 후 예배는 끝났다.
왜 이리 점심이 늦은 건지 창자가 뱃가죽에 붙겠네...
허나 원래 이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 하루에 두끼만 먹고 지내는 사람들이니
내가 잘못한 것이다.
도시에 나가 공부하던 아이가 세끼먹고 소화불량으로 고생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이지 부끄럽고 부러웠다.
 
리장으로 다시 돌아오며
그들이 부른 노래를 휴대폰에 담아 듣고 또 들었다.
한국에 와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 영상을 보여주니
어느새 새힘이의 십팔번이 "질래질래" 되었다.
 
 
리장 여전히 가슴 뛰고 또 가고 싶다.